요즘 금융권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20조 원에 달하는 돈이 사라졌다는 소식입니다.
사라졌다는 표현은 다소 자극적으로 들리지만, 정확히는 은행에 ‘묵혀 있던 돈’이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 돈의 이름은 바로 요구불예금(要求不預金), 즉 ‘언제든 찾아 쓸 수 있는 예금’입니다.

1. 요구불예금이란 무엇인가
요구불예금은 이름 그대로, 언제든 요구(요청)하면 찾을 수 있는 예금을 뜻합니다.
보통 우리가 사용하는 입출금 통장, 급여통장, 사업자통장, 자동이체 통장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됩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보통예금’, ‘저축예금’, ‘당좌예금’ 등이 있지요.
요구불예금은 만기가 없고 자유롭게 입금·출금이 가능하기 때문에, ‘대기성 자금’이라고도 불립니다.
즉, 어떤 특별한 투자 목적 없이 잠시 보관해 두는 돈, 혹은 필요할 때 즉시 꺼내 쓸 수 있는 자금이죠.
그러다 보니 금리는 매우 낮습니다.
정기예금이 2~3%의 이자를 준다면, 요구불예금은 연 0.1%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예금의 목적은 ‘돈을 불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보관하는 것’에 있습니다.
2. 왜 사람들은 요구불예금에 돈을 넣을까?
요구불예금은 투자용이라기보다는 생활 자금용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경우죠.
급여가 입금되면 우선 통장에 보관했다가,
생활비·공과금·카드값이 자동이체로 빠져나감
사업자는 거래처 결제 대금이 들어오고 나가는 중간 계좌로 사용
투자자들은 주식 매수 기회가 올 때를 대비해 현금을 대기시켜둠
즉, ‘다음 움직임을 기다리는 돈’이 바로 요구불예금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 대기성 자금이 급격히 줄었다는 건,
사람들이 그 돈을 ‘다음 단계로 움직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한 달 새 20조 원 감소,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25년 9월 말 기준,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669조 원이었습니다.
하지만 10월 23일 기준으로 649조 원, 즉 한 달 만에 약 20조 원이 빠져나갔습니다.
하루 평균 약 8700억 원꼴로 줄어든 셈입니다.
이런 규모의 예금 감소는 1년 3개월 만의 최대 폭이라고 합니다.
작년 여름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원인이 좀 다릅니다.
당시엔 금리 상승으로 투자자들이 예금을 정기예금으로 옮겼다면,
이번엔 반대로 ‘대출 규제’와 ‘투자 열기’가 동시에 작용한 결과입니다.

4. 대출이 막히자, 현금이 움직였다
최근 부동산 대출 규제가 강화되면서
수도권을 중심으로 주택담보대출(주담대)을 받기가 매우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15억 원 이상 고가 주택의 경우 주담대 한도가 4억~2억 원으로 축소되었죠.
이러다 보니 집을 사려던 사람들은 결국 은행에 넣어두었던 현금까지 꺼내 쓴 것입니다.
대출이 막히니, 그동안 대기시켜 두었던 자금—즉 요구불예금—을 직접 사용하게 된 것이죠.
부동산뿐 아니라 주식시장도 호황세를 보이면서
국내 주식 투자 예탁금이 사상 최대인 80조 원을 돌파했습니다.
요구불예금 중 일부는 증권사로 이동해 투자자금으로 흘러간 것으로 분석됩니다.
결국, 돈이 빠져나간 게 아니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5. 마이너스통장으로 몰리는 자금
또 다른 흥미로운 변화는 대출 풍선효과입니다.
주담대가 막히자,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10월 기준으로 5대 은행의 신용대출 잔액은 104조 원으로,
한 달 전보다 7000억 원 넘게 늘었습니다.
특히 마이너스통장 잔액이 5300억 원 증가해
작년 이후 최대 폭을 기록했습니다.
이 말은 곧, 사람들은 대출이 어려워지자
‘남은 한도 내에서 쓸 수 있는 신용’을 최대한 끌어다 쓰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과정에서 통장 속 예비자금(요구불예금)까지 동시에 소진된 것이죠.
6. 은행의 대응 — “예금 금리 다시 올려라”
요구불예금이 빠져나가자 은행들도 긴장했습니다.
원래 기준금리가 낮아지면 예금 금리도 함께 내리는 게 자연스러운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예금 금리를 올리는 역전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국민은행, 하나은행, 카카오뱅크, 케이뱅크 등 주요 은행들이
정기예금 금리를 0.05~0.1%포인트씩 인상했습니다.
대기성 자금이 빠져나가면 은행의 유동성 관리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은행 입장에서는 요구불예금이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돈’이지만,
그만큼 ‘언제든 유입될 수도 있는 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금리를 소폭이라도 조정해 고객을 붙잡으려는 겁니다.
7. 왜 요구불예금 변화가 중요한가
요구불예금은 금융시장의 ‘심리 지표’로 볼 수 있습니다.
돈이 움직이지 않고 통장에 머물러 있을 때는,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느끼거나 투자 기회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반면 요구불예금이 빠르게 줄면,
사람들이 행동에 나서고 있다는 신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지금은 한국의 가계·투자자들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실제로 돈을 ‘움직이고 있는 시기’입니다.
부동산, 주식, 혹은 다른 투자처로 흘러가는 자금의 방향이
앞으로의 경기 흐름을 가늠할 핵심 단서가 됩니다.
8. ‘현금의 이동’이 보여주는 경제의 단면
경제는 항상 숫자 뒤에 ‘심리’가 숨어 있습니다.
요구불예금의 감소는 단순히 통장 잔액의 변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불안과 기대가 교차하는 장면입니다.
대출 규제로 인해 신용이 제한되자,
가계는 남은 현금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동성의 방향 전환을 예고합니다.
투자자들은 예금을 깨서 주식시장으로 향했고,
일부는 부동산 잔금으로, 또 일부는 마이너스통장 상환 자금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이동할 뿐입니다.

9. 앞으로의 전망
금융당국은 이번 현상을 일시적 현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와 주택거래 위축으로
실제 매매 자금 수요가 지속되긴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심리적 전환점입니다.
사람들이 “은행에 묵혀두는 것보다 쓰는 게 낫겠다”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점,
이것은 시장의 온도를 바꾸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요구불예금이 줄고, 대신 고금리 정기예금이나 주식 투자로 돈이 이동한다면,
그 자체가 유동성 재편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 마무리 — 통장 속 ‘묵혀둔 돈’이 말해주는 것
요구불예금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우리 모두의 심리, 소비, 투자, 그리고 불안이 담겨 있습니다.
은행의 통장 잔고가 줄어드는 현상은
‘돈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돈의 용처가 바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금이 빠져나간 만큼, 어디선가 새로운 경제 활동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죠.
결국 요구불예금의 변화는
경제의 맥박을 보여주는 가장 즉각적인 지표입니다.
통장이 가벼워지는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경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일지도 모릅니다.